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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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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길버트(1544-1603)는 영국의 의사이자 물리학자로, 전기와 자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과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런던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왕립내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길버트는 지구가 거대한 자석임을 실험으로 증명하고, 전기와 자기를 구분하는 등 1600년 저서 《자석론》을 통해 과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연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실험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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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길버트
기본 정보
이름윌리엄 길버트
출생일1544년 5월 24일
출생지콜체스터, 잉글랜드
사망일1603년 11월 30일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국적영국
직업의사
학력케임브리지 대학교 (의학 박사, 1569)
분야물리학, 약학, 의학
주요 업적자석 연구, De Magnete (자석에 관하여) 저술
업적
알려진 업적자석 연구
기타
로마자 표기William Gilbert
발음 (IPA)/ˈɡɪlbərt/
윌리엄 길버트

2. 생애

윌리엄 길버트는 1573년 영국 왕립내과협회(College of Physicians영어)의 회원으로 당선되었다. 왕립내과협회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1599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601년부터 1603년 사망할 때까지 엘리자베스 1세의 주치의로 지냈으며, 여왕이 죽자 후계자인 제임스 1세는 그를 내과의사로 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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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과학적 업적은 1600년에 출판된 ''자석론, 자성체 및 거대한 자석인 지구에 대하여''(''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테렐라라고 부르는 지구 모형을 이용한 많은 실험들을 설명한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지구 자체가 자성을 띠고 있으며, 이것이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는 이유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지구 중심이 철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자석을 절단하면 각각 북극과 남극을 가진 새로운 자석이 형성된다는 것을 고려했다.[6][7]

제6권, 제3장에서 그는 지구의 자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태양 중심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고정된" 별들이 상상 속의 구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고 거리도 다양하다고 가정한다.

"전기"라는 영어 단어는 1646년 토마스 브라운 경이 처음 사용했는데, 길버트가 1600년에 사용한 라틴어 신조어 ''electricus''에서 유래했으며, "호박과 같은"이라는 뜻이다. 그는 호박을 사용하여 정전기를 연구했는데, 호박은 그리스어로 ''elektron''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전기력''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전기 측정 기구인 검전기를 발명했는데, 이것은 그가 ''베르소리움''이라고 부른 회전 바늘 형태였다.[8][10]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수정(투명한 석영)이 압축된 얼음으로 형성된 특히 단단한 형태의 물이라고 믿었다.

길버트는 전기와 자기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증거로 (잘못되게) 전기적 인력은 열로 사라지지만 자기적 인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하지만 자기는 실제로 열에 의해 손상되고 약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두 효과 모두 단일 힘인 전자기의 측면임을 보여주었다.

길버트는 자기가 별들 사이의 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하늘의 운동은 구의 회전이 아니라 지구의 회전 때문이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갈릴레오보다 20년 전이다. 1590년대에 달 표면의 표식을 지도로 만든 최초의 사람이었다.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그의 지도는 달 표면의 어둡고 밝은 부분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그는 동시대 사람들 대부분과 달리 달의 밝은 부분은 물이고 어두운 부분은 육지라고 믿었다.[11]

''De Mundo'' 202페이지에 나오는 우주 다이어그램


1651년 암스테르담에서 316페이지 분량의 4권짜리 책인 ''De Mundo Nostro Sublunari Philosophia Nova''(우리의 지상 세계에 대한 새로운 철학)가 출판되었다. 존 데이비에 따르면, 이 책은 베이컨보다 더 정밀하고 실용적인 자연 철학 지식을 갖고 있던 길버트가 학파의 철학에 대한 반대를 더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존 로비슨 교수는 ''De Mundo''가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잔해 위에 새로운 자연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했다.[4]

윌리엄 휴얼은 ''귀납 과학의 역사''(1859)에서 길버트가 ''자석론''에서는 지구의 자기적 힘이 지구 축의 방향, 일일 자전 속도, 달의 공전 속도를 결정한다는 모호한 개념만 가졌지만, 유작인 ''De Mundo nostro Sublunari Philosophia nova''(1631)에서는 한 천체가 다른 천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언급했다.[12][13][14]

2. 1. 출생과 교육

1544년 5월 24일, 잉글랜드 에식스주 콜체스터에서 자치구 기록관이었던 제롬 길버드의 아들로 태어났다.[3] "길버트"(Gilbert영어)는 후세의 영어 철자법에 따라 쓴 표기로, 원래 표기는 "길버드"(Gylberde영어)이다. 지역에 있는 고전문법학교(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155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몇몇 기록에 따르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도 공부했다고 한다. 1560년 학사과정을 마친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3] 1569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MD 학위를 받았다.[3]

콜체스터에 있는 길버트 가문의 15세기 집, 팀퍼릴리스

2. 2. 의사로서의 활동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MD 학위를 받은 후, 런던에서 의사로 개업하여 유럽 대륙을 여행하기도 했다.[3] 1573년, 왕립내과의사협회의 회원이 되었다.[4] 1600년에는 왕립내과의사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4] 1601년부터 1603년 사망할 때까지 엘리자베스 1세의 주치의였으며, 제임스 1세도 그를 주치의로 재임명했다.[5]

2. 3. 사망

1603년 11월 30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흑사병으로 추정된다.[16][17] 길버트는 그의 고향인 콜체스터의 성 트리니티 교회에 묻혔다. 그의 대리석 벽면 기념비는 현재 폐쇄된 사크센 교회이자 카페와 시장으로 사용되는 이 교회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18]

3. 업적

윌리엄 길버트는 자기전기에 대한 연구로 물리학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화학보다 물리학에 더 흥미를 느꼈지만, 당시 화학이 연금술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하여 전기와 자기 연구에 집중했다. 1600년, 18년간의 연구 끝에 《자석, 자성체, 거대한 자석 지구에 관하여》(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la, 줄여서 《자석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길버트는 전기자기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저서 《자석에 관하여》는 유럽에서 전기와 자기 연구의 기반이 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나침반을 사용했지만, 그 작동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길버트는 "테렐라"(Terrellala)라는 지구 모형을 통해 지구가 거대한 자석임을 입증하고, '마늘이 자석의 힘을 약화시킨다'거나 '천연자석으로 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는 등 자석에 대한 당시의 미신적인 믿음들이 틀렸음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자석에 관하여》 2권에서는 전기에 대한 내용이 다뤄진다. 길버트는 자석의 힘과 호박의 힘, 즉 전기력이 다르다고 주장하며, 전기학과 자기학을 분리했다. 이는 19세기 초 전자기학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별개의 학문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길버트는 베소리움이라는 검전기를 고안하여 실험전기학의 기초를 닦고, 발산기를 매개로 한 근접작용으로 전기력 모델을 제시하여 정전기학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그는 지구가 자성을 가진 활동적인 존재라는 자기철학을 주장하며, 지구가 스스로 움직인다는 지동설에 자연학적,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의 자기철학은 케플러, 윌킨스, 에게 영향을 주어 새로운 우주관 형성에 기여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와 근대 물리학적 우주론 사이의 중간 단계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길버트의 이론은 수학적이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이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길버트 이전에는 주로 신비주의자들이 과학을 연구했다. 길버트는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실험적 방법으로 기존의 믿음을 비판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옹호했다. 그는 실험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여 다른 사람들이 실험을 재현할 수 있도록 했다.

길버트는 태양중심설을 지지했다. 그는 거대한 천구가 존재하여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지구중심설은 비합리적이며, 작은 지구가 회전하는 태양중심설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했다.[33]

길버트는 실험을 통해 과학적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자석에 관하여》 서문에서 "확실한 실험과 증명된 논증"이 철학적 사색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33] 그는 베소리움이라는 검전기를 고안하여 정전기 실험을 수행했는데, 이는 체계적인 전기 실험의 시초로 평가된다.

:기하학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어려운 증명을 위해 조금 미약하고 즉자적으로 이해된 토대들에서 때맞춰 솟아오르자, 그로부터 창조적 정신이 창공 위로 솟아올랐다. 우리의 자기 원리와 과학도 마찬가지인데, 순서별로 보면, 먼저 약간 드문 사건과 관련된 일정한 사실들을 설명해주고, 여기서부터 좀 더 예외적인 종류의 사실들로 나아가 마침내 지구에 있는 가장 비밀스럽고 내밀한 것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옛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또는 현대인의 무관심으로 눈에 띄지 않았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33]

3. 1. 주요 연구: 자기와 전기

길버트는 처음에 화학보다 물리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나, 화학이 연금술적 환상에 빠져 있다고 판단하여 연구 방향을 전기와 자기로 전환했다. 18년간의 연구 끝에 1600년에 저서 《자석, 자성체, 거대한 자석 지구에 관하여》(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la, 줄여서 《자석에 관하여》)를 출판하였다.

길버트는 전기자기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의 저서 《자석에 관하여》는 유럽에서 전기와 자기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나침반을 사용했지만, 나침반 자석이 방향을 알려주는 원리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길버트는 자석에 관한 당시의 신비주의적 믿음들, 예를 들어 '마늘이 자석의 자성을 약화시킨다'거나 '천연자석으로 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틀렸음을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또한 "테렐라"(Terrellala)라는 지구 모형을 통해 지구가 거대한 자석임을 밝혔다.

윌리엄 길버트의 테렐라 모형


《자석에 관하여》 제2권에서는 전기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길버트는 자석의 원인이 호박의 힘, 즉 전기적인 힘과는 다르다고 언급하며, 전기학과 자기학을 독립된 분야로 나누었다. 이는 19세기 초에 전자기학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별도로 설명되어야 하는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길버트는 전기학과 자기학을 분리하고, 베소리움이라는 검전기를 고안하여 실험전기학의 틀을 잡았다. 또한 발산기를 사이에 둔 근접작용으로서 전기력 모델을 만들어 정전기학의 출발점을 구축했다. 그는 지구가 자성을 가진 활성적인 존재라는 자기철학을 제창하여, 지구가 스스로 운동한다는 지동설에 자연학적, 형이상학적 근거를 부여했다.

길버트의 자기철학은 케플러, 윌킨스, 으로 이어져 새로운 우주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관념과 근대적인 물리학적, 동역학적 우주론의 중간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길버트의 논증은 수학적이지 못하고 아리스토텔레스식이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길버트 이전에는 신비주의자들이 과학 연구를 주도했다. 길버트는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실험적 방법으로 기존의 믿음을 반박하고,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지지했다. 그는 실험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여 누구나 실험을 반복할 수 있게 했다.

길버트는 지구 자기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나침반이 북극을 가리키는 이유에 대해 북극성이나 자석 섬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길버트는 지구가 큰 자성체라고 설명하고 "테렐라"(Terrellala) 모형으로 이를 증명했다. 그는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며, 이것이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이유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길버트는 《자석에 관하여》에서 호박에 의해 발생하는 정전기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는 그리스어로 호박을 뜻하는 "ήλεκτρον|엘렉트론el"에서 유래한 "electricus|엘렉트리쿠스la"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오늘날 유럽 언어에서 전기를 뜻하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

3. 2. 《자석에 관하여》(De Magnete)

윌리엄 길버트의 저서 《자석에 관하여》 1628년판 표지


《자석에 관하여》(De Magnete)는 1600년 윌리엄 길버트와 그의 동료 애런 돌링(Aaron Dowling영어)이 함께 출판한 책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책은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베소리움이라는 검전기를 고안하여 정전기를 연구하고, 전기자기를 분리하여 19세기에 전자기학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별개의 학문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33]

주제
1자석에 관한 역사적 조사 및 지구가 자성체라는 이론
2자기와 전기의 차이 및 영구 기관의 불가능성
3테렐라 모형 (Terrellala) 실험
4편각(Declination) - (자북극 위치)
5복각과 자기 경사계 (magnetic inclinometer영어) 설계
6별과 지구의 운동에 대한 자기적 이론 및 분점 위치



길버트는 이 책에서 '마늘이 자석의 자성을 약화시킨다'거나 '천연자석으로 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는 등,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여러 믿음들을 실험을 통해 검증하여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또한, 테렐라라는 지구 모형을 통해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자석에 관하여》 제2권에서는 전기 현상을 다루는데, 길버트는 자석의 힘과 호박의 힘, 즉 전기적인 힘이 다르다고 언급하며, 전기학과 자기학을 독립된 분야로 나누었다.

3. 2. 1. 지자기

길버트는 자기에 대한 연구로 물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지구 모형인 '테렐라'(Terrellala)를 사용한 실험을 통해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며, 이것이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이유임을 밝혔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나침반이 북극성이나 북극 근처의 큰 자석 섬 때문에 북쪽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지구가 자성체라는 혁신적인 주장이었다.[33] 길버트의 이러한 연구는 현재까지도 옳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당시 과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3. 2. 2. 천문학

길버트는 자기에 대한 연구로 물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600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자석에 관하여》(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la)는 전기자기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나침반을 사용했지만, 그 원리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길버트는 '테렐라'(Terrellala)라는 지구 모형을 통해 지구가 거대한 자석임을 증명했다.

《자석에 관하여》에서 길버트는 전기와 자기를 분리하여, 전자기학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별개의 학문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지구가 자성을 가진 존재라는 자기 철학을 제창하여 지구중심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지지했다.

길버트는 달이 지구를 도는 이유를 자석 사이의 힘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영향을 주어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 기여했다.[33]

3. 2. 3. 전기

윌리엄 길버트는 콜체스터에서 자치구 기록관이었던 제롬 길버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교육받았으며,[3] 1569년 케임브리지에서 MD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관리직을 잠시 맡은 뒤 런던에서 의술을 행하기 위해 떠났고, 유럽 대륙을 여행하기도 했다. 1573년 왕립내과의사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600년에는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4] 1601년부터 1603년 사망할 때까지 엘리자베스 1세의 주치의였으며, 제임스 6세 겸 1세도 그의 임명을 갱신했다.[5]

그의 주요 과학적 업적은 1600년에 출판된 ''자석론, 자성체 및 거대한 자석인 지구에 대하여''(''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이며, 로버트 노먼의 초기 연구에서 영감을 받았다.[6][7]

길버트는 전기자기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나침반을 사용하여 바다를 항해하였지만, 나침반의 자석이 어째서 방향을 알려주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길버트는 자석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당시에 퍼져있던 자석에 관한 이야기들을 실제 실험으로 옮겨 보았다. 그는 '마늘이 자석의 자성을 약화시킨다', '천연자석을 통해 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와 같은 당시의 신비주의적 믿음이 틀렸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다. 또한 "테렐라"(Terrellala)라고 불리는 지구 모형을 통해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자석론》 제2권에서는 전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책에서 자석의 원인은 호박의 힘, 즉 전기적인 힘과는 다르다고 언급하면서, 그 때까지 '호감과 반감, 감추어진 힘' 등 불확실한 용어를 사용하여 같은 분야로 취급되어오던 전기학과 자기학을 각각 독립된 분야로 나누었다. 그로 인해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은 별도로 파악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현상으로 나뉘게 되었다.

길버트는 《자석론》에서 호박에 의해 발생하는 정전기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그리스어로 호박을 뜻하는 "ήλεκτρον|엘렉트론el"에서 전기를 "electricus|엘렉트리쿠스la"라고 이름붙였다.

길버트는 1603년 11월 30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흑사병으로 추정된다.[16][17] 그는 고향인 콜체스터의 성 트리니티 교회에 묻혔다.

3. 2. 4. 태양중심설

길버트는 태양중심설을 옹호하였다. 그는 우주에 매우 커다란 크기의 천구가 존재하여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하는 지구중심설은 매우 터무니없는 주장이며, 오히려 작은 크기의 지구가 도는 태양중심설이 더 이치에 맞는 설명이라고 주장하였다.[33]

길버트가 태양중심설의 신봉자가 된 계기는 자신의 자기에 대한 관심이 천상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추론은 바로 행성들이 자기에 의해 태양을 중심으로 궤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회전하는 지구의 흔들림이라는 관점에서 분점의 세차를 얼마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구에 중심을 둔 수정 천구의 관점에서 그 현상을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했다. 또한 길버트는 지구에서 별까지의 거리는 서로 다르고, 여러 행성들을 거느리고 있는 태양과 같은 천체들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6권, 제3장에서 그는 지구의 자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태양 중심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거대한 천구(그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함)가 매일 회전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지구가 자전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고정된" 별들이 상상 속의 구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고 거리도 다양하다고 가정한다. 그는 "가장 얇은 에테르 속에, 또는 가장 미묘한 제5원소 속에, 또는 진공 속에 있는데 – 어떻게 별들이 이 거대한 구들의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 물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말이죠?"라고 말한다.

3. 2. 5. 실험주의

길버트는 실험을 통해 과학적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석에 관하여》 서문에서 "비밀스러운 것들의 발견에서, 그리고 숨겨진 원인들의 탐구에서 더 강력한 이유들은 철학적 사색가들의 그럴듯한 추론과 의견이 아닌 확실한 실험과 증명된 논증에서 나온다."라고 주장했다.[33]

그는 자신의 실험 방법을 상세히 기록하여 다른 사람들도 쉽게 재현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베소리움이라는 검전기를 고안하여 정전기에 관한 실험을 수행했는데, 이 장치는 대전된 물체를 가져갔을 때 바늘이 돌아가는 정도를 통해 정전기의 작용을 파악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체계적인 전기 실험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길버트는 '마늘이 자석의 자성을 약화시킨다'거나 '천연자석으로 두통을 치료할 수 있다'는 등,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비주의적 믿음을 실험을 통해 반박했다. 그는 또한 테렐라라는 지구 모형을 통해 지구가 거대한 자석임을 증명했다.

4. 다른 학자들에 대한 영향

윌리엄 길버트의 연구는 당시와 후대의 여러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저서 《자석론》(''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은 획기적인 실험과 이론을 제시하여 과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길버트는 정전기를 연구하면서 호박(그리스어로 elektron)을 사용하여 실험했고, 그 효과를 '전기력'이라고 불렀다. 그는 최초의 전기 측정 기구인 검전기를 발명했는데, 이것은 그가 '베르소리움'이라고 부른 회전 바늘 형태였다.[10] 토마스 브라운이 1646년 처음 사용한 "전기"라는 영어 단어는 길버트가 1600년에 사용한 신라틴어 'electricus'에서 유래했으며, "호박과 같은"이라는 뜻이다. 길버트는 물체와 호박의 마찰이 "발산물"을 제거하여 흡인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이 물질(전하)이 모든 물질에 보편적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8]

길버트는 전기와 자기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잘못되게) 전기적 인력은 열로 사라지지만 자기적 인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증거로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자기도 열에 의해 손상되고 약해진다.[4]

윌리엄 휴얼은 그의 저서 ''귀납 과학의 역사''(1859)에서 길버트가 지구의 자기적 힘이 지구 축의 방향, 일일 자전 속도, 그리고 달의 공전 속도를 결정한다는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했다.[12]

4. 1.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길버트의 실험적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갈릴레이는 길버트의 저서 《자석론》에 있는 실험들을 실제로 실행하였고, 길버트를 "최초의 과학자"라고 칭하며 실험적 과학자의 창시자로 높이 평가했다.[10] 길버트는 정확하고 반복적인 실험을 중요시했으며, 고대의 철학적 접근법에 의존하지 않고 실험과 이성적 판단으로 논리적 결론을 유추하는 방법을 추구했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길버트의 과학적 방법론에 큰 감명을 받았다.[9]

갈릴레이가 중요하게 여긴 연구 방법은 기존의 철학적 접근이 아닌, 반복되는 실험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논리적인 결론을 유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무거운 돌과 가벼운 돌을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려 어느 것이 먼저 떨어지는지 확인하는 실험을 통해 기존의 믿음을 검증했다. 길버트의 실험 방법과 결론을 서술하는 방식은 갈릴레이에게 핵심적인 기여를 했으며, 갈릴레이는 자신의 책에서 윌리엄 길버트를 "최초의 과학자"라고 칭송했다.

4. 2. 요하네스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는 윌리엄 길버트가 중력의 근원을 자기로 본 것에 최초로 뜻을 같이 한 인물이다. 케플러는 1608년 11월 10일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파브리키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구가 회전해도 던져 올린 돌이 같은 지점에 떨어지는 이유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자기(磁氣) 고리가 지구와 함께 회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34]

케플러는 저서 《옹호》에서 "영국인 윌리엄 길버트가 자석을 연구하면서 ...(중략)... 코페르니쿠스를 옹호하려는 나의 논의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었다."라고 언급하며 길버트의 연구가 자신의 코페르니쿠스 옹호에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34] 이 《옹호》는 길버트의 《자석에 관하여》가 출판된 직후인 1600년 10월에서 1601년 4월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케플러는 1603년 1월 12일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영국으로 날아가 길버트와 이야기하고 싶다. 그의 기본법칙을 통해 행성의 운동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쓸 정도로 길버트의 연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34]

케플러는 길버트의 자기학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물리학적, 인과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티코 브라헤의 관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도출한 케플러 제1법칙과 제2법칙에서는 길버트의 자기중력론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케플러에게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이었다.

4. 3. 잠바티스타 델라포르타

잠바티스타 델라포르타(1535-1615 추정)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학자로, 윌리엄 길버트보다 앞서 자석과 자력에 대한 폭넓은 실험적 연구를 진행했다. 델라포르타의 주요 저서인 《자연마술》(De Magia Naturalis, 1589)은 총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제7권 '자석의 불가사의함에 대하여'는 자석과 자력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델라포르타는 이 책에서 철에 대한 자석의 인력뿐만 아니라 자화 능력도 원격작용에 있으며, 그 힘이 거리와 함께 감소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11]

시기적으로 델라포르타의 《자연마술》이 길버트의 《자석에 관하여》보다 앞섰지만, 자석과 자기에 관한 업적은 델라포르타보다 길버트가 더 많은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델라포르타의 업적이 과소평가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자석에 열을 가하면 자력이 상실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공로를 길버트에게 돌리지만, 델라포르타 또한 같은 실험을 통해 파라켈수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오히려 열이 자력을 파괴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최초로 증명했다.[11]

길버트는 델라포르타의 연구를 과소평가했지만, 그의 저서에서 델라포르타를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으로 많이 언급하며, 델라포르타가 길버트를 포함한 자석과 자기에 관한 과학 발전에 기여했음을 시사한다. 길버트는 델라포르타의 《자연마술》에 대해 "몇몇을 제외하면 그다지 정확하지도 주의 깊지도 않다. 이 책은 잘못된 실험 투성이다."라고 평가했지만, "더욱 상세히 조사해볼 만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을 인정했다.[11]

4. 4. 크리스티안 비르켈란

노르웨이의 과학자 크리스티안 비르켈란(Kristian Birkeland)은 길버트 사후 약 300년 뒤인 1895년경, 오로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테렐라 모형을 발전시켰다. 비르켈란은 진공 탱크 속에 구형 자석을 넣고 음극선을 쏘아 테렐라 극 주위에서 오로라와 유사한 불빛이 반짝이는 현상을 관측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오로라가 지구 자기장과 상호작용하는 입자들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4] 비록 이 실험으로 실제 오로라가 북극 가까운 곳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비르켈란은 음극선이 태양에서 오는 전자이며, 흑점 활동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오로라에 관한 그의 이론을 테렐라 모형을 통해 실험하는 비르켈란

5. 비판

프랜시스 베이컨은 지동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구의 자전 운동을 지지하는 길버트의 철학적 연구를 비판했다. 베이컨은 다음 두 가지 진술을 통해 비판을 가했는데, 첫 번째 진술은 그의 세 작품, 즉 '''학문의 진보''' (1605), '''새로운 기관론''' (1620), '''학문의 진보''' (1623)에서 반복되었다. 더욱 날카로운 두 번째 진술은 베이컨 사후에 출판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에 대한 역사'''에 나온다.[19]



연금술사들은 용광로의 몇 가지 실험으로부터 철학을 만들어냈고, 우리 동포 길버트는 자철석 관찰로부터 철학을 만들어냈다.





[길버트]는 스스로 자석이 되었다. 즉, 그는 그 힘에 너무 많은 것을 귀속시켰고, 조개껍데기로 배를 만들었다.


참조

[1] 논문 Gilbert, William (1544?–1603) https://doi.org/10.1[...]
[2] 문서 While today he is generally referred to as William Gilbert, he also went under the name of William Gilberd. The latter was used in both his and his father's epitaphs and in the records of the town of Colchester. 1893
[3] acad
[4] 논문 Biographical memoir 1893
[5] 서적 Latitude & the Magnetic Earth Icon Books
[6] 학술지 The Origin of William Gilbert's Scientific Method http://philoscience.[...]
[7] 서적 The De Magnete of William Gilbert Amsterdam
[8] 학술지 The early meaning of electricity: Some Pseudodoxia Epidemica – I
[9] 문서 1893
[10] 문서 1893
[11] 웹사이트 A Short History of Lunar Cartography http://uias.astro.il[...] University of Illinois Astronomical Society 1996-04
[12] 서적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https://books.google[...] D. Appleton
[13] 서적 De Magnete
[14] 서적 De Mundo
[15] 문서 1893
[16] 웹사이트 William Gilbert http://www.magnet.fs[...] National High Magnetic Field Laboratory
[17] 웹사이트 William Gilbert (1544–1603) https://www.bbc.co.u[...] BBC
[18] 웹사이트 Colchester, Holy Trinity Church Historic Essex Guide http://www.britainex[...] 2016-10-29
[19] 서적 A History of Electricity https://archive.org/[...] J. Wiley & Sons
[20] 서적 History of the Royal Society: from its Institution to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R. Baldwin
[21] 서적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from the Earliest to the Present Time https://books.google[...] D. Appleton
[22] 서적 Introduction to the Literature of Europe in the 15th, 16th, and 17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Little, Brown, and Company
[23] 서적 Kepler The Macmillan Company
[24] 사전 Merriam-Webster Collegiate Dictionary
[25] 웹사이트 William Gilbert(astronomer) http://venn.lib.ca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6] 학술지 The Origin of William Gilbert’s Scientific Method
[27] 서적 The De Magnete of William Gilbert Amsterdam
[28] 학술지 The early meaning of electricity: Some Pseudodoxia Epidemica - I 2007-07-16
[29] 서적 On the Lodestone and Magnetic Bodie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30] 웹사이트 A Short History of Lunar Cartography http://uias.astro.il[...] University of Illinois Astronomical Society 1996-04
[31] 웹사이트 William Gilbert, brief biography at National High Magnetic Field Laboratory http://www.magnet.fs[...]
[32] 웹사이트 William Gilbert brief biography at bbc.co.uk http://www.bbc.co.uk[...]
[33] 서적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과학 들녘
[34] 서적 과학의 탄생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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